중학교 몇 학년 때였더라.
우리 반에는 착하지만 공부를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공부를 못하는 것 치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이 엄청 길었다.
전교 1등도 쉬는 점심시간에도
그 친구는 혼자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교과서에 밑줄을 치며 공부를 하곤 했다.
성실하기는 또 얼마나 성실한지
화장실에 다녀오는 잠깐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수업 시간 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늘 공부 삼매경이였다.
저 정도로 뚝심있게 공부하면 사법고시도 붙을 것 같은데
등수는 왜 맨날 운동부와 앞뒤를 다투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느 날 나의 궁금증이 풀렸다.
우연히 그 친구의 영어 교과서를 보게 된 날이였다.
영어 교과서를 몇 번이나 정독했는지
교과서의 흰 바탕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색색의 형광펜과 삼색볼펜으로 빼곡하게 밑줄이 그어져 있기는 한데
문제는.... 모든 알파벳, 국어로 따지면 모든 음절마다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apple 라는 단어면 ⓐⓟⓟⓛⓔ 이런 식으로 말이다.
I am a boy와 같은 문장이 I/am/a/boy 로 동그라미가 되어 있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 이렇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으면 과연 학습이 될까.
철자를 외우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과정일지도 모르지만
덩이글로 이해해야하거나 글의 흐름을 봐야 하는 경우에는
아마도 학습이 불가능한 상태가 아닐까.
이후로 슬쩍 넘겨본 다른 교과서도 모두 같은 상태였다.
문장으로 읽어야 이해가 될 것을 음절 단위로 보고 있으니
이해는 둘째치고 외워질리도 없지.
그 친구는 그 수많은 시간을 그냥
아주 성실하게 교과서에 동그라미만 치면서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 알 수 없는 상황을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 겪어 왔다.
멀쩡하게 대학을 나온 성인이 네다섯 살에 배울 법한
오른쪽, 왼쪽을 혼동한다면 이건 지능의 문제일까, 주의력의 문제일까?
병원을 찾은 환자가 "오른쪽 무릎이 아파요"라고 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환자의 오른쪽 무릎이 아프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회사에 있었던 학습장애가 있는 직원은
자신이 보고 있는 방향에서 상대방의 오른쪽 다리를 통통통 두들겨 볼 것이다.
오른쪽 다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왼쪽 다리를 두들겨 보는 주치의를 보면서
환자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황당, 당황, 의구심, 놀라움 기타 등등의 표정을 짓겠지.
그 직원 덕분에 우리는 매일 그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 회사의 일은 단순 작업은 아니지만
일이 처리되는 흐름을 이해하고 있으면
평범한 사람 기준으로는 실수할 일이 없다.
그런데 그 직원은 아무리 알려주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실수를 반복했다.
아무리 해도 오른쪽, 왼쪽을 헷갈려하기에 보다못한 다른 직원이
장비에 노란 고무줄을 묶어주시며 "이걸 오른손으로 잡아"라고 하셨다.......
어떤 사람은 질문을 안하고 사고 치는 것보다야
질문은 많이 해도 실수를 안하는게 낫다고 하는데
질문도 많이 하고 실수도 많이하는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팀원들은 다들 말수도 적고 점잖은 분들이라
매일 나만 화가 나는 줄 알았는데
부처님 같은 팀원 분도 조용히 한마디 하셨던 적도 있다.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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