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신년의 기운이 물씬 풍기던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대학 동기의 전화를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를 받았는데
동기의 목소리가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선배가 죽었어."
동기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어떤 말도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아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침묵만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동기였다.
"발인이 내일이래. OO이랑 OO이랑 지금 조문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 수 있어?"
가야지.. 당연히 가봐야지...
서둘러 옷장을 열고 입고 갈만한 옷을 찾았다.
조문이라는 것이 낯선, 그때의 나는 아직 20대였다.
추운 겨울에 입고 갈만한 검은색 단정한 옷이 많지 않았다.
프린트가 있거나 장식이 달린 옷들 뿐이었다.
이 옷을 입고 가면 선배는 하하 웃으면서
역시 너답다. 하고 할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멍해서 슬픈 줄도 모르겠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선배는 나이가 많았다.
직속 선배는 아니었지만, 복수전공으로 우리 과 수업을 듣고 있었다.
친해지게 된 계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친해졌던 것 같다.
선배는 휴학을 많이 했고 학사경고도 받았다고 했다.
쉼을 반복하며 지지부진하게 학업을 이어가는 동안
선배의 동기들은 졸업을 했거나 졸업반인 상태였다.
선배는 나이가 많았지만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장난을 잘 치는 유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루두루 잘 어울렸지만 우리 동기 무리와 죽이 잘 맞았다.
가끔 학교를 나오지 않고 연락조차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러다가 또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곤 했다.
"선배 이러다가 학교 짤리겠어요."
"술먹고 어디서 죽어있었던거 아니예요?"
우리가 농담반 걱정반으로 조잘댈때도 선배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웃음만 가득 띌 뿐이었다.
*
팀플때문에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있었던 날이었다.
집에 가려고 셔틀을 탔는데 선배를 만났다.
"선배! 요즘 왜 또 학교 안나왔어요."
"몸이 안좋아서 집에서 쉬었어."
"술먹고 뻗은건 아니고요? 그러다가 진짜 죽어요."
걱정 섞인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였다.
아주 짧게, 선배의 얼굴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
*
참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날의 기억은 왜 이리 생생한지 모르겠다.
그 날의 공기, 그 날 선배의 목소리, 그 날의 담담한 대화가
조울증이 뭔지, 조울증약을 먹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르던 나에게
왜 이렇게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박혀버린건지.
*
선배는 고등학교 때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우울한 기분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그런줄 알고 영양제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몸이 땅으로 꺼지는 것 같은 날이 지속되고
처음엔 자각하지 못했지만 본인이 환청을 듣는다는걸 알게 된 뒤로 어렵게 정신과를 찾았다.
정신과에서도 처음에는 우울증, 그 다음은 조현병,
몇 번의 진단이 바뀌고 최종적으로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발병의 원인도 알 수 없고
기운이 넘치다가도 땅으로 꺼져버리는 듯한 조울증의 증상이 본격화되면서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출석일수가 모자라서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뒤에 대학에 왔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온 대학에서도 휴학을 반복하다보니 동기들도 모두 떠나고
홀로 외롭고 힘들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
선배는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계속 인지하려고 노력했다.
들뜬 기분을 억누르기 힘들 때도, 기분이 땅 속으로 떨어져서 죽고 싶을 때도
이것은 뇌가 이상신호를 보내는거야. 이건 실제가 아니야.
나.는.지.지.않.아.
나.는.지.지.않.아.
나.는.지.지.않.아.
나.는.지.지.않.아.
*
그날 이후로도 나와 선배는 친하게 지냈다.
어려운 이야기를 털어놓은 사람에게 기댈법도 한데
선배는 단 한번도 자신이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잘 웃고 유쾌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졸업을 한 뒤에도 선배는 내 생일이나 새해가 되면 먼저 안부를 물어주었다.
나는 가끔 선배를 떠올리긴 했지만 한번도 먼저 연락한 일이 없었는데.
그게 여전히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사진으로 만난 선배가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선배.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날 때 선배가 좋아하던 과자 질리도록 사드릴께요.
그때까지 행복하게 지내세요.
우리 꼭 다시 만나요.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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