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요즘 들어서 분노를 참기가 더 힘들다.
요즘 발작버튼이 눌렸던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뭘 써야 할지 고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오늘 집안 청소를 하다가 책상 아래 넣어둔 찌그러진 상자를 보았다.
상자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집에서 가장 믿음직하고 가장 함부로 대해도 되는 포지션을 맡고 있다.
힘든 일, 어려운 일, 돈 들어가는 일은 모두 내 차지인데
나는 어디에 떨어뜨려놔도 잘 살수 있는 (독한) 인간이기 때문에
챙김을 받는 것은 늘 마지막이었다.
나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참 우습지만
친가 외가를 통틀어서 나이로만 따지만 내가 제일 막내인데
챙김 서열은 늘 제일 마지막이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나보다 20살이 많지만 아무 것도 할 줄 몰라서
엄마가 밑반찬을 챙겨줘야 하는 소녀같은 늦둥이 이모보다도
챙김 서열은 더 아래이다.
물론 그런 이모까지 챙기는 것은 나의 몫.
나는 위로 남자 형제가 하나 있었다.
'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한 이유는
내 인생의 절반 넘게 그 사람의 얼굴을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을 살겠다고 한국을 떠난 그 사람이
머나먼 타국 땅에서 사고쳐서 생긴 빚과,
무슨 암에 걸렸다며 요구하는 치료비를 해결하는 것도 전부 나의 몫.
사업병에 걸린 아빠와
자기 선에서 수습해보겠다며 더 큰 빚을 만드는 엄마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전부 나의 몫.
내 인생을 갈아 넣으며 보낸 세월이 이제 내 인생에서 절반을 넘었는데
내가 더 이상은 못한다고 말하자 "그럼 이 집에서 나가" 라고 말하던 사람들.
그 다음날 집을 구하고 집을 나오기까지 딱 3주가 걸렸다.
독립을 했으니 이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이후로도 툭하면 돈 문제로 나를 괴롭혔고 내 책임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이후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처참한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도 참 미련한 인간인게 부모라고 연을 끊어내지도 못하고
서럽고 서운한 일이 있어도 꾹꾹 눌러 참고 또 참아왔다.
그러다가 정말 사소한 일에서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 있었다.
그날도 날씨가 무척 더웠다.
월요일이 휴가였기 때문에 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부모님 집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월요일에 내 집으로 갈꺼라고 여러 번 이야기도 했다.
토요일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일요일에는 장을 잔뜩 봐서 냉장고를 채워넣고
하루 종일 부엌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반찬을 여러 개 만들어두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엄마가 최대한 불 앞에 서있지 않도록
국도 여러 개 끓여서 소분해 두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어느 새 밤이었다.
이제 좀 쉬어볼까 했는데 엄마가 한마디를 한다.
"이제 가는거지?"
"다섯 번은 얘기한거 같은데, 월요일 아침에 간다고?"
"내일 아침에 아빠도 나간다고 했는데 아침에 번잡스러우니까...."
이렇게 말 끝을 흐리며 갑자기 내 짐을 막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또 한번 내가 이 집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엄마는 아침에 아빠를 챙겨야 하는데 내가 있는 것이 번거로웠던 것이다.
그 밤 나는 내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나는 그 날 운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하면 안될 것 같았다.
가다가 가로수를 들이받든, 낭떠러지로 떨어지든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았다.
보통의 부모님들은 밤 운전은 위험하니까 해 뜨면 가라고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마구 치밀어 오르는데, 도저히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지만
부모님 집 주차장에 차를 두고 갈 수는 없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짐을 정리하고 아직 뜯지 않은 마스크를 상자에 넣으려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은색 깡통 상자가 눈물에 비쳐 반짝하는데 뒷덜미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는게 느껴졌다.
쾅.쾅.쾅. 상자를 세번 내리치니 형편없이 상자가 찌그러졌다.
마치 내 마음처럼.
어찌보면 정말 사소한 일이고, 뭐 그런걸로 서운해하고 그러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너무 오랜 기간 상처를 받아서 아주 사소한 일로도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아무나 잡고 소리를 지르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분명 더 큰 후회가 남을 것이라는건
불보듯 뻔한 일이라 어떻게든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죽을 힘을 다 하고 있다.
내 마음은 이 싸구려 깡통 상자처럼 오랫동안 조금씩 찌그러져서
이제 다시는 펴지지 않을 것 같다.
펴지더라도 분명 찌그러졌던 흔적이 남겠지.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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