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래된 남사친에게 전화가 왔다.
-여자친구 때문에 경찰서에 다녀왔어- 라며 운을 뗐다.
워낙 스스럼 없는 사이라 별별 이야기를 다 하고
서로의 연애사에 대해서도 알만큼 아는 친구였다.
*
몇 달 전에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혼자 갔다가
역시나 혼자 왔던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
내 친구는 성격이 소극적인 편이라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닌데
그녀가 먼저 "혼자 오셨어요?"라며 말을 걸었고
콘서트가 끝나고 저녁 식사도 같이 하며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대화를 하다보니 맛집 찾아다니는걸 좋아한다거나
응원하는 야구팀이 같다거나
그것 외에도 신기할 정도로 공통적인 관심사가 많았고
그녀가 어찌나 말을 잘 이끌어내던지
소극적인 내 친구도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뒤었다.
"어쩐지.. 요즘 연락이 통 없으시더라니~ 연애사업 중이셨구만?"
"암튼 그렇게 해서 사귀게 되었어. 요즘 거의 매일 만나는 중이라 연락할 짬이 없었네"
"직장인이 매일 데이트라니 체력들이 대단하시구만?"
"여자친구가 잠깐이라도 매일 보고 싶어해서. 나도 요즘 좀 피곤하긴 하네"
들은 바로는 서로의 직장과 집이 상당한 거리인데도
여자친구분은 단 30분이라도 매일 만나기를 원했다.
친구가 야근이라도 하는 날에는 친구의 회사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워... 그건 너무 오바 아니냐. 야근이 언제 끝날 줄 알고 기다려?"
"그러니까. 그나마 요즘은 야근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지.
그래도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이때 나도 조금 쎄한 느낌이 들었지만
연애 초반이니까 그렇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친구도 데이트가 끝나고 나면 항상 여자친구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야근까지 한 날은 여자친구 집까지 갔다가 자기 집으로 오면
시간이 너무 늦어지는게 좀 피곤하지만 그거 빼고는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일단 여자친구가 자기에게 너무 잘한다며.
이런 대화를 나누고 몇 달 뒤에 받은 전화가
-여자친구 때문에 경찰서에 다녀왔다-라는 황당한 내용의 전화였다.
*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매일 만나기를 원하는 여자친구의 요구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여자친구는 어떠한 상황이 되어도 반드시 자기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좀 피곤할 뿐이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는데
문제는 친구의 일이 시즌/비시즌이 뚜렷한 일이라는 것이였다.
바빠지는 시즌이 되면 친구는 출장도 잦고 거의 매일 야근을 해야만 했다.
처음 다툼이 벌어진 날은 친구가 며칠째 야근을 했던 날이였다고 한다.
[오늘은 쉬고 내일 만나면 안될까?]라는 문자에
"내가 매일 만나야 한다고 했잖아!!!!!!!"라며 괴성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대더란다.
결국 어르고 달래고 화를 내보아도 안되길래 일단 만났는데
여자친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더란다.
여자친구의 말로는 자기가 예전에 만나던 남자친구들이 바람을 핀 경험이 많아서
불안함에 자기도 모르게 그랬다며.
그렇게 악마처럼 소리를 질러대던 여자친구가 갑자기 180도 태도를 바꾸는게
황당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비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해서
그날은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갔다고 한다.
*
그런데 그 날이 시작이였다.
이제는 자기가 과거에 어떤 상처가 있었는지 내 친구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연락에 무섭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은 만났을 때 표정이나 행동에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친구가 좀 덜 웃는다고 느끼거나
자기가 신나는 만큼 신나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면
미친 듯이 화를 내거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우울해하곤 했단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오빠는 너무 좋은 사람이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야] 라고 하다가
또 별 것도 아닌 일에
[너는 쓰레기야. 세상에서 니가 제일 최악이야] 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감정의 극단을 달리는 여자친구에게 점점 지쳐가던 와중에
사건이 터진건 친구의 출장날이였다.
당일치기 지방 출장이라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데
전날 밤에 도무지 전화를 끊지 않더란다.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
"나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이제 자야 할 것 같아"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온갖 험한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인내심 게이지가 한계에 도달한 친구는 그냥 전화를 끊고 전원도 꺼버렸다고 한다.
출장지에서 핸드폰을 켰을 때
엄청난 양의 부재중 전화와 엄청난 양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너는 날 버렸어]와 같은 문자도 있었고
[오빠같이 착한 사람에게 상처줘서 미안해]와 같은 말도 있었다고 한다.
불과 1,2분 사이를 두고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상대방의 모습에
질릴대로 질려버린 친구는 [이제 그만 헤어지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전원을 꺼버렸다.
이 일은 내가 이 친구를 알고 지낸 그 오랜 시간동안 처음으로 본 잠수이별이였다.
*
친구는 이별을 고했고, 그게 끝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끝이 아니였다.
출장지에서 돌아와보니 여자친구가 집 앞에 와 있었다.
-손에 칼을 들고-
내가 죽겠느니, 너를 죽여버리겠다느니 엄청난 실랑이가 있었고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해서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 없이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경찰서에서 조서까지 쓰고 멘탈이 탈탈 털린 뒤에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난 뒤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
나는 그녀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내 친구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만 그녀를 추측할 뿐이니
그녀가 분노조절장애인지 아니면 다른 정신적 문제가 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평소에는 매우 멀쩡해보인다는 점, 공감능력도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중간이 없이 기분이 냉탕과 온탕을 마구 오간다는 점에서
경계선 성격장애가 아닐지 추측해본다.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들을 보면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면
끝없이 애정을 퍼부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다가
상대방이 거리를 두고 있다고 느끼면
매우 공격적으로 행동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문을 잡아주는 것 같은 기본적인 매너에도
상대방을 천사라고 생각하며 푹 빠졌다가
한번 문을 잡아주지 않으면 바로 악마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과거의 어떤 사건들로 인해
제대로 된 자존감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비합리적인 생각의 흐름을 갖게 된 것은 아닐지.
어쨋든 내 친구는 이후로 다행히 별 문제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중이다.
결혼도 했고 요즘은 애 둘을 키우느라 힘들고+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소식을 알 길이 없는 그녀도 잘 지내주길.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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