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지 한달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하시고 눈밭을 구르며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했던 가엾은 제 어머니께서 홀로 저를 키우셨죠. 어머니께는 제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에 대한 사랑과 기대도 매우 크셨죠. 가지고 싶은 것 다 갖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주셨습니다. 물질적으로 저는 정말 풍요로웠습니다. 그래서 철모를 때 저는 제가 부자인줄 알았습니다. 공부도 꽤 잘했고 용돈도 많이 받아 친구들에게 늘 사주는게 일상이었죠. 그런 저는 남들이 보기에 아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게 보였을 겁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실제로 내 속은 창피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가득찬 열등감 덩어리라는걸 아무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죠.
무시당하기 싫습니다. 누구에게도요.
아버지가 없어도 어려울 것 없이 자랐는데 왜 나는 이렇게 되었을까?
나이를 들면서 삶이 괴로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저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주 어릴 때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줄도 몰랐습니다. 미국에 가셨다는 어머니의 말을 믿었죠. 하지만 클수록 의문이 들더군요. 왜 나를 보러 한번도 안올까? 전화나 편지는? 그리고 더 큰 뒤에 깨달았습니다. 아.. 아버지는 세상에 없구나. 그걸 깨달은 날 혼자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실을 알았다는 걸 아신 어머니도 많이 속상하고 미안해하셨죠. 차라리 처음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해주는게 나았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당하게 아버지 미국에 계시다고 떠드는 저를 보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있는 다른 아이들이 누리는 걸 다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마음에 어머니는 정말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성실하고 능력도 있으셔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셨죠. 야근은 늘 일상이셨고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시간은 늘 아침에 등교하기 전 잠깐이었습니다. 바빠서 저를 챙길 시간이 없으신만큼 전화는 자주 하셨죠. 하지만 바쁘셔서 길게 통화는 못하고 제가 집에 일찍 들어왔는지 밥은 먹었는지 확인차 용건만 간단히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저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하지만 당시 저는 그런 어머니가 전혀 고맙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통제 속에서 저의 감정을 만져주신적이 한번도 없으셨거든요.
당신의 전부인 제가 친구들과 늦게 돌아다니면 나쁜길로 빠질까봐 6시 전에는 무조건 집에 들어와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릴 시간도 없는 저는 늘 집에 혼자 있으면서 TV만 보았죠. 그런데 성적이 떨어지자 어머니는 TV 때문이라며 전원선을 가위로 잘라버리셨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괜히 나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의문이 들고 힘들 때에도 대화다운 대화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물질적 지지 속 고독하던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 속에서 자존감과 사회성을 키울 기회를 잃은 것 같습니다. 제 세상엔 오직 저와 아침에만 잠깐 보는 어머니 뿐이었죠. 하지만 그런 어머니는 저를 볼때마다 늘 나무라시기 바쁘셨습니다. 기대가 크신만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제가 속상하셨나봅니다. 제가 성적이 올라도 잘했다는 칭찬 보다는 하나만 더 맞았으면 백점이었잖아! 식의 아쉬운 소리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오직 한 사람인 어머니께 늘 혼나니 자존감이 과연 생길 수 있었을까요?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밖에서 제가 아버지가 없어서 무시당할까봐 늘 노심초사하셨습니다. 나가서 얻어먹지 말고 사주라고 용돈을 많이 주셨죠. 그래서 제 주변에는 사람이 꽤 있긴 했습니다. 친구라고 불릴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적당히 비위 맞추며 얻어먹을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들은 얻어 먹으면서도 뒤에서는 저를 돈 많다고 꼴값 떤다고 욕했습니다. 돈 쓰고도 욕먹는 신세.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엔 뜻대로 되지 않았죠. 사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를 보러 놀러오는척 하지만 결국 어머니가 주시는 용돈을 받으러 오는 것 뿐이었습니다. 와서는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시기와 질투만 했죠. 내가 갖지 못한 것은 생각해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게 필요한게 아니라 정서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었는데 말입니다.
이런 여러 상황들이 겹쳐 고등학생이 되면서 뒤늦게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이 생겨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불량학생들과 어울렸습니다. 그치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죠. 어릴때부터 통제속에 살았던 저는 아무리 나쁜짓을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또 그 무리에서 튕겨져 나오고 혼자. 저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도 사귀어보았습니다. 하지만 깊은 관계가 되진 못하였습니다. 깊이 이야기 하다가도 어느순간 벽을 치며 자신를 보호하려 하더라고요.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그 친구에게서 저를 보았습니다. 자존심만 있고 자존감은 낮은 우리. 동질감은 느껴도 자신의 거울 같은 상대가 서로 편할리가 없죠. 더 나이들면 다를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우리는 그로 인해 다시 멀어졌습니다.
이후 대학생이 되고 사회 생활을 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크게 바뀐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습관처럼 돈을 쓰며 친목을 유지하고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 어느정도 벽을 치고 사람을 만나고. 당당해보이지만 속으로는 주눅들어 누가 조금만 건들면 무시하는줄 알고 날을 세우는…
나이들고나서 어머니와 비로소 이런 깊은 이야기를 했을때 어머니는 제게 사과를 하셨습니다. 나를 위한다고 일하시면서 졸업식도 한번 안오신걸 후회하신다고. 결국 자존심 지키자고 주변에 뿌린 허튼 돈 때문에 그 고생을 하시고도 어머니는 은퇴하실때 손에 쥐신게 없으셨습니다. 사회 생활 하고 있는 저도 마찬가지고요.
이해는 합니다. 요즘에는 편부 편모가 많지만 제가 어릴 당시에는 그런 경우가 드물어 어머니도 자신과 제가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 당하는게 싫으셨을 겁니다. 제가 뭘 잘못하면 애비없어 그렇다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이셨겠죠. 그래서 좀더 잘하라고 매번 꾸짖고 저를 물질적으로 많이 지원해주시느라 애쓰신 걸 너무나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물질들이 다 허상이고, 나는 부자가 아니며, 어머니의 무리한 희생 속에 억지로 짜낸 것들이었던 것에 불과하다는걸 좀더 빨리 깨닫고, 물질보다는 정서적으로 조금만 더 교류할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랬다면 저도 좀더 어머니를 이해하고 감사하며 살았을텐데… 저는 저 힘든것만 알았지 어머니도 힘드시다는 건 어리석게도 철들고나서야 알았거든요.
어머니도 저도 결국엔 무시당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살아온 것밖에 안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그게 오히려 늘 더 주변의 반감을 샀다는 걸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한발 앞서 살아가신 어머니를 보며 저는 이제라도 자존심 지키기 위한 허튼 돈은 쓰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그걸로 없던 자존감이 생기는 건 아닌지라 고민이 많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도 늦게라도 재혼을 하셨고, 저도 이제 나이도 먹을만큼 먹어 아버지 때문에 무시당할 나이도 아닌데 어릴때부터 뿌리내린 습성은 고쳐지지가 않네요. 별것 아닌 농담에도 나를 무시해서 저러나 싶은 쪼잔한 자존심 때문에 힘이 듭니다. 누가 뭐라해도, 실제로 무시한다고 해도 상처받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단단한 자존감을 갖고 싶습니다. 하지만 산책하며 생각을 많이 해봐도 상처받지 않는 방법은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것 말고는 없는것 같아 속상합니다.
우습게도 제가 어릴적 홀로 외로울때 관심없던 친척들이 최근 제게 상담을 해옵니다.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지인의 아이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신걸 말해주는게 좋겠냐거나 아버지 없이 자란 나의 당시 심정들을 묻고는 합니다. 내 무뎌지고 있는 상처를 다시 후벼파고 있는 그들이 미우면서도 아이를 생각하면 동질감과 안쓰러운 마음에 정성을 다해 응해주게되네요. 그 아이의 어머니도 아이에게 명품 옷만 사입힌다는 소리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어머니의 마음은 다 같구나 하는 생각. 부디 세상의 편부편모 가정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당당하게 자존감을 키우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네요.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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