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고리즘으로 영화 <거짓말>이 떴다.
피부과에서 일하고 있는 여주인공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금방 계약할 것처럼 고급 아파트를 구경하고
값비싼 가전제품 매장을 돌며 부자행세를 한다.
그리고 동료들에게는 곧 결혼할 부자 남자친구가 있다고 자랑을 하고
손님이 두고 간 명품 화장품을 자신의 것인 양 거리낌없이 바르기도 한다.
하지만 거짓말은 곧 허점을 드러내고
그 허점을 채우기 위한 또 다른 거짓말로 주인공은 점점 무너져가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경력직으로 들어온 그 사람은 회사에 있던 몇 달 동안
아주 짧고 굵게 회사를 뒤집어놓고 사라졌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팀도 다르고 업무가 겹치는 일도 없어서
사실상 가까워질 일이 없었는데
그 분은 우리 팀, 그 중에도 유난히 나에게 적극적으로 친밀감을 표현하셨다.
아침에 간식거리를 두고 가시기도 했고
비싼 원두로 내린거라며 집에서 내려온 커피를 주시기도 했다.
굳이 다른 팀에게까지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건지
어리둥절하고 부담스러운 마음도 들었고
적정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적당히 우호적인 관계로 지내고 있었다.
그 분은 항상 비싸보이는 옷과 악세서리를 하고 다녔다.
나야 명품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없지만
명품에 관심이 많은 직원이 어느 날 꼬치꼬치 캐물었나보다.
명품 이야기를 하다가 그 분의 배경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학창 시절 내내 외국에 살았고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비싼 동네, 비싼 아파트에 살며
몇 년 전에 이혼을 하고 아이 둘을 키우고 있고
잘 나가는 의사 남자친구가 있는데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한다.
이후로도 몇몇 소문들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사실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이 나에게 커피 한잔 하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거절할 명분도 찾지 못했기에 그 분을 만났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분은 나에게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에 높은 분이 자신을 스토킹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업무 문제로 몇 번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나중에는 늦은 시간에도 전화를 해서
집 앞이니 잠깐 나오라고 한다거나 술을 마시자고 하는 등 부적절한 언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방으로 자신을 불러 은근히 몸을 더듬고
며칠 뒤에는 아이 간식 챙겨주라며 100만원이 든 봉투를 건냈다는 것이다.
순간 너무 놀란 나는
이건 직장내 성희롱으로 고발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핸드폰에 있는 통화시간, 문자 내용으로 고발할 수 있으니 당장 고발하라고 말하자
그 분은 그 동안의 내용은 전부 삭제했고
지금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퇴근 후에는 그 분을 차단해 두기 때문에 기록이 없다고 했다.
번호 차단을 해도 목록에 들어가면 전화한 기록이 남는다고 했더니
아이폰은 기록이 남지 않는다고 하며 서둘러서 자리를 떴다.
나는 평생 안드로이드 유저였기 때문에 아이폰은 기록이 남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일단 자신의 팀 사람도 아닌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점.
그렇게 분개해놓고 인사위 말이 나오니까 얼굴색을 바꾸며 물러났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그저 나의 생각이지만
스토킹을 한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상 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행동을 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점.
이것이 내가 그 분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 첫 번째 에피소드였다.
그 분의 팀에서는 그 이후로도 많은 일이 있었는지
어느 새 그 분의 별명은 [입벌구]가 되어 있었다.
입벌구란 [입만 벌리면 구라]라는 뜻의 신조어인데
그 분이 밥먹듯이 하는 거짓말에 팀원들은 아주 죽을 맛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업무는 시작조차 하지 않고 다 했다고 하고
제출하라고 하면 파일이 지워졌다고 하고
일은 쌓이는데 상사 딸래미 학용품에 붙여준다고
이름표 만들고 앉아있고(상사가 시킨 적도 없는데)
퇴근하는걸 분명히 봤는데 다음 날에는 야근 수당이 청구되어 있고.....
그 분 팀원에 따르면 그 분이 회사에 와서 하는 일은
상사 앞에서 재롱잔치,
명품 자랑,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 자랑,
남자친구에게 선물받은 것 자랑하기가 전부였다고 한다.
마치 영화 <거짓말>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자신이 주목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도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모든 화제를 자신에게 돌리고 하루 종일 떠벌떠벌 입을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업무는 모두 남에게 떠맡기고 자랑만 하기에 바쁜 그 사람 때문에
어느 날 팀원 한 사람이 그 분에게 화를 낸 적이 있는데
갑자기 으악! 하더니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다고 한다.
다들 너무 놀라서 의무실로 급히 이송을 시켰다.
몇 시간 뒤 안정을 취하고 나온 그 분과 내가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너무 딱 마주치는 바람에 피할 수도 없어서 괜찮으시냐고 안부를 물었다.
솔직히 한숨 푹 자고 나온 사람처럼 너무 괜찮아보였는데
그 분은 갑자기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자신이 공황장애가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절할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사람이 기절을 했는데 (나에게 화를 낸) 그 사람은 나 모른 척 하더라?"라고 덧붙였다.
기절했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냐고 묻자
"기절했어도 소리는 다 들려!"라며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이 그 분과 나의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 분은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게 되었다며
회사를 떠나셨다.
그 분이 퇴사하던 날 위에 명품에 관심이 많다고 했던 직원이 조용히 말했다.
"저거 다 짝퉁"
나는 아직도 그 분이 왜 그렇게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이런 사람이
멀쩡하게 사회를 돌아다닌다는 사실도 너무나도 놀라웠다.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해서 큰 이득을 취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만 고립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 왜 그 분은 거짓말을 참지 못했을까.
이런 것도 충동조절에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더 주목받고 싶고, 돋보이고 싶다는 심리적인 욕구를 조절하지 못하여
거짓말을 하고, 이 거짓말을 포장하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하는 악순환을 생각하면
이 또한 충동조절장애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분은 지금 어디서 어떤 새로운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작성자 익명
신고글 [충동조절장애] 그 사람의 거짓말은 충동적인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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