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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아득한 트라우마에 많이 지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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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버지는 참 인자하시고 정도 많고 사랑도 지극하신 분 이세요.

쑥쓰럼도 많으시고 마음도 참 여리신데 

그래서 일까요 술에 의지를 많이 하셨었습니다.

 

평소에는 친구같고 자상한 아버지지만 술에 취하면 눈빛부터가 달라지세요.

마치 다른사람으로 바뀐 듯 아주 많이 난폭하게요.

 

아빠가 퇴근 후 귀가 시간이 늦어지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 날이면 엄마와 저는 작은 방에서 

불안에 떨며 폭력적인 아빠를 맞이해야 할 시간을 

숨 죽이고 기다렸어야 했어요.

귀가한 아빠는 당연하다는 듯 엄마에게 갖은 폭언과 폭력을 밤새도록 쏟아 부었습니다.

많은 알콜중독자들이 그러하듯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몇 날 몇 일을 술로만 보내셨어요.

 

형제 자매도 없었기에 그 악몽같은 시간들을 엄마와 단 둘이 견뎌냈어야 했어요.

이기적이지만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빠의 폭력은 오로지 엄마에게로만 향해 있었어요.

그렇기에 저는 어렸지만 엄마는 내가 지켜주어야 할 존재가 되었고

또 내가 엄마에게 잘 하지 않는다면 엄마는 언제고 나의 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직도 생생해요.

6학년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

술에 취한 아빠가 엄마랑 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잠깐 나가 있으라 해서 옆 방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작은 방에서 저를 애타게 부르며 살려달라는 외침에 달려가 보니.

엄마가 저렇게 아빠에게 맞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제발 밖에 나가 도움을 청해달라고 외치셨어요. 

하지만 잠시라도 눈을 돌렸다간 엄마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아서 아빠에게 애원도 해보고 때리기도 하고 제발 그만하라 소리쳐도 봤지만 이미 이성이 나가버린 아빠를 말릴 순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무작정 집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렇게 지켜주고 싶고 지켜야했던 엄마를 두고요.

일단 내가 살고 봐야겠다하는 마음이었어요.

 

그 날 내 두려움 때문에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고 엄마를 혼자 버리고 온 나를 용서하지 못했어요. 

얼굴, 몸 할 것 없이 일그러진 엄마의 모습이 마치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 말대로 나가서 내가 도움을 빨리 청했다면 엄마가 조금 덜 아프지 않았을까.

엄마의 그 고통스런 시간들이 좀 더 짧지 않았을까.

 

그 후론 나도 엄마처럼 아파야한다는 생각으로 엄마 얼굴에 난 상처를 제 얼굴에도 똑같이 만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길을 가다가 혹은 매체 속에서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눈물부터 나고 가슴이 미어지고 괴로워졌어요. 

그 날 엄마가 입고 있던 옷만 봐도 온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나고 그 집에서 다시 생활해야 하고 그 방에서 잠을 자야한다는 것이 너무 절망스러웠습니다.

 

그 날 밤, 엄마가 저를 부르는 외침이, 살려달라는 외침이 자꾸 귓 속을 괴롭혔고 이곳저곳 돌출되고 함몰된 엄마의 얼굴이 아무리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게속 제 눈 앞에 떠 다녔어요.

그렇게 트라우마가 저를 점점 지배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나날들의 무한 반복 속에서 저도 결국엔 지쳐버렸는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해에 환시, 환청, 우울감, 무기력 등으로 병원을 찾게 됐어요.

처음엔 증상이 심해 조현병으로 진단을 받았었는데 그동안의 트라우마로 인해 조현병 정도의 증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가 온 것이라고 다시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렇게 10년이 훌쩍 더 넘어버린 지금까지도 병원에 다니고 있네요.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직까지도 저를 꽉 붙잡고 있습니다.

병원에 다닌 후로 가족들 모두가 노력했고 

아빠도 세월에 체력이 한 풀 꺾이신 모습을 보이시며 환경이 과거보다는 조금 나아졌어요.

이처럼 제 자신도 저를 괴롭히던 트라우마에게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을까 가끔 기대해 보지만

그 시도조차 아직은 너무 괴로운 일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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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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