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돌아가신지 6개월이 지났다..
아직 집안 구석구석에선 예상치 못한 물건들이 나오고, 추억인지 힘듦인지 모르겠지만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생각보면 나와 시어머니는 처음 출발 자체가 달랐던거 같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아들보다 존중 받으면서 자유롭게 성장을 했고,
대기업 사원으로 민주화와 함께 여성의 사회생활을 쟁취하기 위해 늘 조직과 싸워야했고,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반면 시어머니는
본인의 선택보다는 집안의 순리에 따라
충주에서 서울로 얼굴만 본채로 결혼을 했다..
그시대 누구라도 그랬듯 남편과 아들을 하늘처럼 여겼고,
여자들이 사회에서 일을 한다는건
드라마에서처럼 암투와
불륜 그리고 일탈이 생긴다는 막연함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이 어떤점이 잘못된건지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아가는 힘듦이 무엇인지 미처 깨달지도 못했었던거 같다..
늘 퇴근을 하면 아이들이 집에 있어도 혼자 들어가질 못했다.
그때의 대문은 지옥문이였고
그녀의 목소리는 뱀처럼 귀를 멤돌아
심장이 두근거려 집앞을 서성이다 겨우 진정을 시켜 들어가거나
남편의 퇴근을 기다려 들어가야 했다...
그녀가 제일 이해할수 없는 점은
첫째 잦은 야근과 회식이였다...
나는 수출부서 개발파트에서 일을 했고,
바이어가 들어오는 시즌이면 상담과 개발로 제시간에 퇴근을 한적이 없었다..
그리고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시대 90년대는 퇴근후 자연스런 술약속이 많았고,
회사의 회식을 함부로 빠지는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또한 여자들이 아직은 인정을 많이 받지 못하는 시기라 얼마나 치열하게
전쟁처럼 일을 해나가는 지 그녀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해외출장은 더더욱 반대를 심하게 했다..
아들의 밥거리를 항상 문제 삼았고
난 늘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다보니
유럽출장은 늘 4일만에 먼저 들어와야했고,
그 흔한 관광을 해본적이 없다...
다행이 나의 일은 매우 바빴고, 성취감 또한 커서 사회의 일원으로 지내는 건 너무 큰 행복이였다.
회사에서는 집안의 일은 거의 잊고 지낼수 있었고
아이들도 다소 말썽을 피우긴 했지만
큰 문제없이 잘 성장을 해주기도 했다..
물론 여기엔 친정부모님의 지대한 희생이 따르기도 했다..
몸에 이상이 생겨 더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퇴사를 할때
그녀는 나의 갱년기와 좋아하던 일을 그만두게 된 아픔을 헤아려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시모의 목소리를 들으며서
예전에 내가 느꼈던 공포로 다가와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결정으로 친청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 왔을때
그녀가 오히려 치매를 앓고 있다는걸 알게 됐다...
평소 의심과 폐쇄적인 성격이 오히려 좋지않은 영향을 줬고
5년간의 투병끝에 작년 6월에 돌아가셨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만
지금도 나는 시모를 떠올리면 좀더 좋은관계를 갖지 못한 아쉬움과
시모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함은 지금도 많이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
서로간에 조금만더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면 어쩌면 조금 쉽게 해결할수 있었던 문제를
경험없고 친절하지 못한 내가 스스로를 가두어 뒀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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