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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전화벨 소리가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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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핸드폰은 모닝콜을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는다.

진동도 아니고 무조건 무음.

전화도, 카톡도, 그 외 모든 알람도 무음이라  

가족이나 친구들의 연락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못해서 원망섞인 말을 들을 때도 있고

가끔은 중요한 메시지를 나중에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전화를 수시로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지낸지는 10년도 넘은 것 같다. 

전화를 수시로 확인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음을 고집하는 것은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나는 한때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막 사회초년생 딱지를 달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나의 첫 사수는 업계에서 꽤나 유명한 분이셨다.

뛰어난 실력도 실력이지만 성격이 불같은 것으로 더 유명한 분이셨다.

이제 막 졸업장을 받고 사회에 나온 내가 업계 속사정을 알리 만무했다.

그냥 이런 실력있는 분이 내 사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열심히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꿈에 부풀었던 내 첫 사회생활이 지옥같이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수는 성격이 많이 급했다.

좀 느긋한 성격인 나에게 사수의 급한 성격도 버거운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사수의 고성이였다.

사수는 사무공간이 따로 있었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하루에 나에게 전화를 100통도 넘게 한 것 같다.

아직 업계 용어도 익숙하지 않고 업무 흐름도 잘 파악되지 않은 신입이지만

성질 급한 사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내가 "네, ooo팀 ooo입니다."라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을 엄청난 속도로 쏟아내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oo씨!!!!! 당장 와욧!!!!!!"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업계에 몸담은지 꽤나 시간이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별 일도 아닌 일들이었다.

프로세스가 완벽하게 파악되지 않은 쌩 신입이라면 

당연히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체득될 수 밖에 없는 일들이었는데

사수는 소양감댐 수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엄청난 기세로 모든 지식을 쏟아내며

당장 내가 이 모든 것을 흡수하길 바랐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한 눈치면 또 다시 소리를 질러대면서.

 

시간이 지나서 내가 독립을 하고 

오롯이 한 사람의 역할을 다 해낼 수 있게 된 상태에서 그 분을 보았을 때

그 분의 행동은 한톨만큼의 악의도 없었다.

그 분은 원래 목소리도 크고 제스쳐도 엄청 큰 사람이고

스스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사장님도 들이받고, 거래처도 들이받는, 그저 화난 코뿔소 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 생각해도 

이걸 직장내 괴롭힘이라고 봐야 할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요즘에야 직장내 괴롭힘이 큰 이슈가 될 사안이지만

내가 신입이던 시절은 지금보다 더 사수의 권한이 막강했다.

괴롭힌다고 보기에도 애매하고, 사수의 권한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보니

20대 초중반의 나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온 몸으로 사수의 전화 폭격, 고성 폭격을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리는 전화벨.

내가 빨리 반응하지 못하면 

책상을 쾅쾅쳐대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고스란히 들리는 이 상황을 계속 겪다보니

이후로 나는 전화 오는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길을 걷다가도 벨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내 전화기에 그 분의 번호가 찍히면 긴장을 해서 손에 땀이 차는게 느껴질 정도였다.

전화를 받는 것도 힘들었지만 내가 전화를 거는 것도 어찌나 무서운지

미루고, 또 미루고,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가 용기를 쥐어짜서 전화를 걸면

그때부터는 '받지 마세요... 제발 받지 마세요..' 하고 주문을 외우는게 습관이 되었다.

전화에 이렇게까지 두려움이 생기다보니

나중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환청까지 들은 경험도 있다.

 

독립을 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전화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극복하지는 못했고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까지도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도 전화를 받을 때 귀에서 수화기를 살짝 떼고 전화를 받는건

사수가 갑자기 내지르는 고성에 놀랐던 그 시절에 생긴 습관이다. 

 

지금은 그 분이 다른 회사로 가셨고 가끔 얼굴을 뵈면 웃으면서 잘 지내고 있다.

그 분이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면 

"어휴! 선배님, 여전히 기력도 좋으시네요!" 하고 

너스레를 떨 수 있을 정도로 나도 경험치가 많이 쌓였지만 

여전히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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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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